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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바

김토끼 · 2025-08-23 · 조회수 76
"잭 마는 늘 자신을 “실패 전문가”라 불렀다. 수많은 시험 낙방, 구직 실패, 투자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오늘은 힘들고, 내일은 더 힘들다. 하지만 모레는 해가 뜰 것이다.”"

1964년, 중국 항저우에서 태어난 마윈(잭 마)은 외모로도, 성적으로도 주목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대학 입학시험에서 두 번 낙방했고, 겨우 세 번째에야 간신히 통과했다. 취업도 쉽지 않았다. KFC가 항저우에 문을 열었을 때, 24명이 지원해 23명이 뽑혔고, 단 한 명 탈락자가 바로 잭 마였다. 그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 외국인 관광객에게 무료로 가이드를 해주며 언어를 익혔다. 그가 후일 유창한 영어로 세계 무대에서 연설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1990년대 중국은 아직 인터넷조차 생소한 시기였다. 1995년 미국을 방문한 잭 마는 처음으로 인터넷을 접했고, ‘중국’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지만 결과는 거의 없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것이 기회다.” 귀국 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작은 사무실에서 전자상거래 실험을 시작했지만, 초창기 두 번의 도전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9년, 항저우의 한 아파트에서 잭 마는 17명의 동료와 함께 다시 창업에 나섰다. 이들이 만든 것이 바로 알리바바였다. 당시 중국 중소기업들은 제품을 세계 시장에 팔고 싶어도 판로가 없었고, 외국 기업들은 중국의 공급망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알리바바는 이 양쪽을 연결하는 온라인 시장을 제공했다. 이름을 알리바바로 정한 이유는 단순했다. “누구나 아는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자금도 인프라도 부족했지만, 그는 “신뢰”라는 단순한 가치를 내세웠다. 초기에는 거래 사기와 불신이 난무했지만, 그는 구매자 보호 제도와 판매자 신뢰 등급을 도입해 온라인 상거래의 장벽을 하나씩 허물었다. 그의 확신은 적중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제조업과 수출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흐름 속에서 알리바바는 자연스럽게 중소기업의 온라인 수출 창구로 자리 잡았다.
2003년, 그는 소비자 시장에 뛰어들며 ‘타오바오’를 시작했다. 당시 중국 시장은 이베이(EBay)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잭 마는 무료 정책으로 맞섰다. 이베이가 수수료를 받는 동안 타오바오는 거래 수수료를 없애고, 사용자 친화적인 디자인과 채팅 기능을 도입했다. 몇 년 만에 이베이는 중국 시장에서 밀려났고, 타오바오는 중국 내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로 성장했다.
알리바바는 단순한 쇼핑몰을 넘어 금융·물류·클라우드로 사업을 확장했다. 알리페이(Alipay)는 중국의 금융 습관을 바꿨고, 알리바바 클라우드(Aliyun)는 아시아 최대 클라우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모든 출발점은 방세도 아슬아슬하던 작은 아파트에서, “우리가 세상을 연결하자”는 믿음을 공유한 18명의 동료였다.
잭 마는 늘 자신을 “실패 전문가”라 불렀다. 수많은 시험 낙방, 구직 실패, 투자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오늘은 힘들고, 내일은 더 힘들다. 하지만 모레는 해가 뜰 것이다.” 알리바바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업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를 끌어안고 끝내 그것을 발판 삼아 제국을 일군 언더독의 기록이다.

Today is hard, tomorrow will be worse, but the day after tomorrow will be 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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