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월트 디즈니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다. 유년 시절 그는 집안일을 돕고 신문을 배달하며 성장했지만, 틈만 나면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첫 시도들은 연이은 실패로 돌아왔다. 창업 초기에 세운 애니메이션 회사들은 잇따라 파산했고, ‘오스왈드 더 럭키 래빗’ 같은 캐릭터의 판권도 통째로 빼앗겼다. 젊은 창업자의 손에는 빚만 남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30년대, 디즈니는 스스로 다시 펜을 들었다. 그리고 탄생한 캐릭터가 바로 미키 마우스였다. 기차 안에서 그린 쥐 한 마리의 낙서가 훗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28년, ‘스팀보트 윌리’가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관객은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속에서 소리를 듣게 되었고, 미키는 단순한 만화 캐릭터를 넘어 애니메이션 역사 자체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의 혁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화는 짧아야 한다”라고 믿던 시절, 디즈니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1937년, 그는 전 재산을 걸고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했다. 주변에서는 ‘디즈니의 바보짓’이라고 비웃었지만, 개봉과 동시에 관객의 환호가 극장을 채웠고, 디즈니는 파산 직전에서 세계적 성공으로 도약했다.
월트 디즈니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사업가이자 비전가였다. 그는 만화를 상품으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라이선스 산업을 개척했다. 미키 마우스는 스크린에서만이 아니라 장난감, 시계, 문구에 등장했고, 애니메이션은 곧 거대한 산업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상상력은 곧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공식을 증명했다.
1955년, 그는 다시 한 번 상식을 뒤집었다. 아무도 꿈꾸지 않았던 테마파크, ‘디즈니랜드’를 개장한 것이다. 은행과 투자자들은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아이들이 꿈꾸는 세계를 현실에 세우고 싶었다. 개장 첫해 400만 명이 다녀간 이 놀이공원은 단순한 오락 공간이 아니라, 스토리와 경험이 결합된 새로운 산업의 시작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 퍼진 디즈니 리조트는 그 선택이 얼마나 대담했는지를 보여준다.
월트 디즈니의 삶은 끊임없는 실패와 재기의 연속이었다. 여러 차례의 파산, 아이디어의 도용, 업계의 냉소에도 그는 “상상력은 한계가 없다”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의 성취는 단지 캐릭터 몇 개의 성공이 아니라, 상상력을 산업으로 바꾼 최초의 기업가적 실험이었다.
오늘날 디즈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제국으로, 마블·픽사·스타워즈까지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제국의 출발점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그린 쥐 한 마리였다.
If you can dream it, you can do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