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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숙련 시대, 일자리는 왜 늘지 않나

기타 · 2025.08.29 · 조회 152 · 좋아요 0
고숙련 시대, 일자리는 왜 늘지 않나

생산성의 역설:

지난 10년간 세계 노동시장은 눈에 띄는 변화를 겪었다.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고숙련 직종의 꾸준한 확대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최신 ‘세계 고용 및 사회 전망(WESO) 2025’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전 세계 고숙련 직종의 비중은 18.9%였으나 2023년에는 20.1%로 높아졌다. 특히 고소득국에서는 절반에 가까운 44.3%가 고숙련 일자리를 차지하며, 노동시장의 중심축이 명확히 이동하고 있다. 고숙련화의 확산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다. 같은 기간 여성의 고숙련 진입 비중은 21.2%에서 23.2%로 상승했다. 의료, 교육,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여성 전문인력이 빠르게 늘어난 것이 주된 요인이다. 중소득국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저숙련 일자리 비중이 줄고, 중숙련 직종이 확장되는 방향으로 직업 구조가 재편되고 있다. 이와 맞물려 나타난 또 하나의 변화는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상승이다.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전 세계 노동생산성은 17.9% 늘었고, 같은 기간 고용 증가율은 13.2%에 그쳤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노동생산성이 39.8%나 뛰었지만, 고용 증가는 10.5%에 머물렀다. GDP 성장률이 55%에 달한 것을 감안하면, 이 지역의 경제 성장은 생산성 향상에 훨씬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료: ILO 국제노동기구
생산성 중심의 성장은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높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용 구조의 변화가 숨어 있다. 같은 생산량을 내는 데 필요한 인원이 줄어들면, 신규 일자리 창출 속도는 자연스럽게 둔화된다. 이는 특히 저숙련 노동자나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층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경쟁은 치열해지고, 일부는 안정적인 일자리에 접근하지 못한 채 비공식·단기 고용에 머무르게 된다. 교육과 직무 간 불일치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2013년에는 전 세계 노동자 가운데 자신의 직무에 맞는 학력을 보유한 비율이 46.6%였고, 2023년에도 이 수치는 47.7%로 소폭 오르는 데 그쳤다. 반면, 과다학력자 비율은 15.5%에서 18.9%로 증가했다. 이는 고학력자가 늘었지만, 그들이 수행하는 업무가 그 학력에 걸맞지 않은 경우가 많아졌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고숙련 직종이 반드시 ‘안전한’ 일자리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고서는 일부 고숙련 직종조차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의 확산으로 재편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회계, 소프트웨어 개발 등 전문성이 높은 분야에서도 업무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될 가능성이 크다. 즉, 고숙련화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기술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고용 안정성은 위협받을 수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고용 없는 생산성 성장’이다. 생산성 향상은 경제 전체에 이익을 주지만, 일자리 총량이 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구조에서는 그 혜택이 일부에만 집중된다.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사회 전반의 불평등 구조가 고착될 수 있다.
자료: ILO 국제노동기구

자료: ILO 국제노동기구

ILO 보고서는 이러한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신산업을 적극적으로 창출하고 기존 산업을 고도화해야 한다. 특히 친환경 에너지, 바이오헬스, 디지털 기술과 같은 신흥 산업은 새로운 고용 기회를 만들어낼 잠재력이 크다. 둘째, 신규 인력에게는 산업 수요에 맞춘 교육과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직업훈련과 현장 실습을 통해 ‘바로 투입 가능한’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이미 노동시장에 있는 기존 인력에 대해서도 재교육과 전환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른 만큼, 한 번 익힌 기술로 평생 버티기는 어려운 시대다. 고숙련 노동 증가와 생산성 향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이 흐름이 노동시장 전체의 활력으로 이어지려면, 생산성의 성과가 새로운 일자리로 연결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생산성의 역설’은 앞으로 더 뚜렷해질 것이다. 경쟁력 있는 경제와 포용적인 노동시장을 동시에 이루는 길, 그것은 바로 기술·산업 혁신과 인력 재교육이 함께 가는 길이다.